헤겔, 회의주의

회의주의의 생성

금욕주의가 추상적 사유의 동일성에만 안착한 주인의 이상(자유)에 해당한다면, 회의주의는 그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노예의 노동에 상응한다. 

금욕주의가 선취된 동일성의 사유에 머물러 있다면, 회의주의는 그 사유된 동일성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현상적 차이를 부정하고 사유의 동일성으로 다시 복귀하는 활동을 수행한다. 그렇게 해서 금욕주의의 추상적 자유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욕주의에서 단순히 형식적 통일성으로 사고되었던 나의 통일성이 실제적으로 타자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운동을 거쳐 도달된 실제적 자유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의식이다.

 

회의주의 의식의 활동

금욕주의에서는 형식과 내용(규정성)이 대립으로 남아 있다면, 회의주의의 의식은 이 타자(내용규정성)의 비본질성과 비독립성을 철저하게 간파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금욕주의의 자유가 ‘자립적 의식의 개념’으로서 사유된 결과의 추상이라면, 회의주의는 ‘자립적 의식의 실현’으로서 다양하게’으로서 규정된 세계 존재를 무화시키는 사유의 활동성 자체이다. 금욕주의가 사유된 것으로서 사유의 결과물이라면, 회의주의는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사유 과정이다.

회의주의의 사유는 타자를 소멸시킴으로써 자기 자유의 확실성을 확인한다. 생 속에서 생의 조건인 노동을 통해 타자의 자립성과 존립성을 부정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유의 확실성을 확인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주의의 의식은 금욕주의에서처럼 추상적 자기정립이 아니라, 타규정성의 무화를 통해 주관성의 심연에서 자기확신에 이른 의식이다. 경험과 생의 모든 규정에 침투해서 그것들을 자기의식 속에서 해체하여 그것이 무임을 입증하고자 하며, 이와 같이 추상적 자기정립을 넘어서서 타자를 현실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확실한 자기정립 또는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신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감각적 확신과 지각과 오성이라는 의식의 장에서 의식활동의 기반으로서 밝혀진 자기의식이 결국은 이처럼 노동하는 자기의식, 즉 회의주의적 의식이었음이 판명된다. 회의주의의 노동이 바로 오성형식 아래 현상을 포섭시키는 노동, 사유의 동일성 아래 현실의 다양성을 무화시키는 노동이다.

 

회의주의의 한계

회의주의적 자아는 특수한 내용에 대한 부정적 작용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주관성의 심연이다. 이 자아는 타자를 부정함으로써만 자기확신을 정립하는 만큼 타자에 얽매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생의 다양성의 부정이라는 회의주의의 노동은 처음부터 부정되어 사라질 것을 향한 노동이다. 생의 다양성을 부정하기 위해 그 생의 다양성으로 추락하고 거기 휩싸이는 것이다. 부정하기 위해 부정될 생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비실재성으로 향하고 비본질에 굴하고 비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적 의식의 방식, 동물적인 생의 방식을 취하고 결국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상실한 상태로 추락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 개별적인 우연적 의식으로부터 다시 자기의식의 본질로, 즉 개별성과 구별성의 부정인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회의주의는 생의 혼탁과 분주함에 휘말려 지내면서 다시금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와 본래적 자기의식에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또 우연적 의식에로 돌아가는 방황하는 의식이다. 한마디로 자유와 비자유, 본질과 비본질, 순수의식과 경험적 의식 간을 오가는 자기모순적 의식이다. 생의 활동인 보고 들음을 행하되,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무의미하고 비본질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의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의식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의식이 갖고 있는 내적 모순을 의식 및 생의 모순으로 스스로 자각하게 된 의식은 더이상 회의주의의 의식이 아니라 그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불행한 의식이다.

 

 

- 한자경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