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
인정의 논리
의식이 사물과 마주하게 되면, 그 사물을 의식하는 대상의식이 된다. 반면, 의식이 다른 자기의식을 만나면, 그 다른 의식에 의해 대상화됨으로써 스스로를 즉자적 사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다른 자기의식이 나를 대상적 사물이 아닌 대자적 자기의식으로 인정해주면,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자기의식으로 의식한다.
다른 자기의식의 인정이 진정한 인정이기 위해서는 나도 그를 인정해야 한다. (1)자기의식에 대해 어떤 다른 자기의식이 등장하면, 자기의식은 그 다른 의식에 의해 대상화됨으로써 대자성을 상실한다. (2) 그러나 타자의 인정을 통해 나는 다시 나의 의식성을 자각한다. 결국 타자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며, 타자를 지양하게 된다. (3) 그러나 나 또한 그 타자를 인정함으로써 상호인정에 이르면, 두 자기의식은 동시에 진정한 자기의식이 된다. à따라서 이와 같은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는 상호적인 운동이다. 스스로 자신의 자기의식의 동일성을 확보하면서, 타자를 자기의식으로 되돌려 놓고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호인정이 이루어지면 행복한 상태가 된다. 이러한 중심에서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상호인정의 원리는 곧 사랑이다. (중심의 확보를 통해 서로를 인정)
주종관계의 성립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체적 자기의식은 사랑보다 욕구의 방식으로 타자를 대하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을 둘 간의 관계의 본질로 정립하면서 타자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기만 다른 자기의식에 의해 인정받고자 한다.
개체적 자기의식은 대자적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대자적 존재이기 위해서는 즉자적 존재성인 생의 원환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자기의식의 활동을 순수 추상이라 한다. 즉자적 존재성으로부터의 순수 추상은2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1) 나를 즉자적 존재로 사물화하려는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2) 나의 자유를 위해 나의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를 내거는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타인과 생명을 내건 투쟁관계에 들어선다.
그러나 인정싸움에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실제로 죽음에 이르면 인정은 발생할 수 없다. 둘 간의 관계에서 한쪽 극이 사라지면 중심도 무너지고, “추상적 부정성” 밖에 남지 않게 되므로, 남아 있는 다른 하나마저도 순수 자기의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인정싸움에서 패한 쪽은 그 자유가 지양될지라도 상대를 인정하는 존재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결국 한 명은 상대로부터 자유로운 대자존재로서 인정받게 되지만,다른 한 명은 상대를 인정할 뿐 자신은 인정받지 못한 채 자유를 상실하고 살아가게 된다.
자기의식이고자 하는 자는 생사를 건 투쟁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겨서 살아있는 한 존재와 생을 넘어선 자유로운 자기의식으로 존재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 죽고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사를 건 싸움에서 승리하여 지배자가 되는 주인의 의식이다. 반면 죽음을 겁내서 패배 속에서라도 생명만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자는 패자로 남아 더이상 자신의 본질을 자유로서 주장하지 못하고 타자인 주인을 위한 생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투쟁에서 패하고도 살아남은 노예의 의식이다. 주인은 스스로를 자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다른 자기의식에 의해서도 인정받는데 반해,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기의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의 존재 역시 생에 얽매인 부자유한 것이 된다.
주종관계의 전도
주인 편에서의 전도
순수 추상을 행한 주인은 사물의 자립성을 자유롭게 부정하며 사물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는 자신을 생의 조건으로부터 추상화시킬 수 없으므로, 결국 생의 조건과 사물존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나아가 생의 굴레를 벗어난 주인은 살기 위한 노동을 노예에게 떠맡긴다. 노예가 사물을 가공해 주인에게 바치면, 주인은 가공된 대상을 부정하면서 노동 없이 사물의 지양에서 오는 향락만을 누린다.
그런데 노예가 주인에 대해 다른 자기의식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노동하는 일개 사물일 뿐이라면, 그렇게 사물화된 노예의 인정은 진정한 인정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결국 노예와의 관계에서 주인의 대자성도 붕괴되고 만다. 나아가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고 노예에 매개됨으로써만 생을 유지할 수 있는 비자립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오히려 노예의 의식 편으로 바뀌게 된다.
노예 편에서의 전도
노예 편에서 전도를 이끌어오는 계기는 ‘죽음의 공포’와 ‘노동’이다. 이 둘은 노예를 노예이게 한 것이면서 동시에 바로 노예를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실제로 노예를 지배하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그가 투쟁과정에서 체험했던 죽음의 공포이다. 노예는 그 앞에서 모든 존립하는 것들의 절대적 유동화를 의식하며 생의 무상성을 경험한다. 이 죽음의 공포가 바로 절대적 부정성이며, 순수한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의식의 본질이다. 노예는 비록 자기 본질을 대자적 존재로 깨달아 알지는 못하지만, 주인의 이상인 절대적 부정성 / 순수 대자적 존재가 사실은 노예의 의식 안에 있다.
나아가 노예는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사물에의 의존성을 지양한다. 주인의 사물에 대한 향락은 대상의 소멸과 함께 소멸해버리므로, 결국 주인의식은 이전의 욕구단계로 되돌아간다. 반면 노예는 노동과 더불어 자신과 세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노동의 산물인 사물의 형상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즉 노예의 활동성이 사물 속에 남겨져 즉자존재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노동의 활동 속에서 노예의 의식은 즉자대자적 존재의 의식에 도달한다. 따라서 노예는 더이상 사물에 종속되지 않고, 나아가 사물을 매개로 노예를 지배하던 주인에게도 더이상 종속되지 않게 된다.
또한 노예는 가공의 노동을 하기 위해 자연필연성을 깨우쳐야만 하며, 그 원리에 따르는 노동을 통해 자연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형태부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 노동이 갖는 자유의 측면이다. 이처럼 노동의 본질은 정신이 자연으로 자기외화하여 자신을 대상화하는 데에 있다. 노동을 통해 정신이 자연이 되며, 대자존재가 즉자존재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정신은 노동을 통해 외화된 그 자연 안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주체의 대상화와 더불어 대상의 주체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대자적 존재인 자기의식 내지 자유를 즉자적 존재인 대상 내지 자연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자기외화하고 자기 전개하는 것이 인간 생의 운명이다. 바로 이런 작업을 하는 자는 순수하게 추상적 자유에 머물러 있는 주인이 아니라, 구체적 노동을 통해 자기외화하는 노예이다.
결국 노예를 노예로 전락시켰던 죽음의 공포와 노동은 다시금 그를 생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립적이고 자유로운 상태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죽음의 공포의 체험, 즉 삶의 무상성의 체험, 존재 일반의 부정성의 체험이다. 그것이 없이 행해지는 노동은 대상적 존재 일반에 대한 보편적 형성이 아니라,단지 제한된 존재자들에만 형태를 부여하는 기술에 그친다. 그렇게 노동하는 의식은 참다운 의미의 노동을 수행하는 자유로운 의식이 아니다.
주종의 자기의식에서 금욕주의로
그러나 실제 노예의식은 한계를 가진다. 첫번째는 대개 노예의 노동이 타성화된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노예의 노동은 존재자 전체에 대한 보편적 형성의 차원으로까지 이르지 못하고 개별 존재자에 대해서만 작업하는 기술로 그치고 만다. 또 다른 한계는 노예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고 자연을 변형하는 노동을 행함으로써 자기의식의 본질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의 본질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된 정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본래 주인의 이상으로서 설정된 대자적 존재의 본질인 자유를 자기 자신의 본질로 자각하여 주종관계를 극복해나가는 노예의식의 해방이 요구된다. >>> 주인적 자유를 자신의 본질로 자각한 노예의 의식은 더이상 노예의식이 아니라, 주종의 대립을 자신의 의식 안에서 화해시킨 새로운 자기의식이다. 그 첫번째 단계가 바로 금욕주의의 의식이다.
- 한자경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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