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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노트/서양철학

헤겔 소개 - 한자경,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2009) 참고

by 엔티쟈 2022. 5. 24.


이 글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자경 선생님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2009)를 참고하였습니다.

서양 형이상학 내에서 헤겔철학은 독일관념론 또는 변증법철학이라고 말해지곤 합니다.

 

 


독일관념론은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을 거쳐서 완성되는 관념론체계를 의미합니다.



독일관념론 자체가 변증법적 사유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변증법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보겠습니다.

 

 

▲ 

변증법은 플라톤에서 대화술을 의미합니다. 플라톤의 책 자체가 변증술을 담고 있는 책이죠.

그리고 대화는 플라톤이 설명한 네 가지 인식 방식 중에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유의 단계에서는, 우리가 수학이나 과학의 명제적 공리를 암묵적으로 전제하듯이, 그러한 전제 위에서 인식이 행해진다면, 가장 상위의 변증적 인식의 단계에서는 그런 전제들을 되묻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데아 자체를 직관할 수 있게 됩니다.

 

 

 

참고로 이 말이 함축하는 바를 하나 더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대화는 음성언어죠. 대응하는 것으로는 문자언어가 있고요. 플라톤에서부터 서양철학에는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우위에 있의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습니다.

현대 언어학의 시초라고 불리는 소쉬르도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음성 언어 단독으로 성립된다, 언어학에 있어 소리를 우선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대화를 통해 얻어지는 이데아의 직관은, 그것이 궁극 근원과 시초에 관한 인식이라는 점, 그리고 일체 현상세계를 전체적 관점 내지 이데아적 영원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인식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신적 직관에 해당합니다.

 

 

스피노자는 인식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구상력에 의한 지각, 오성에 의한 개념적 사유, 직관능력에 의한 직관.

그중 최고의 인식은 직관이고, 이것이 영원의 상 아래에서 개별 사물을 인식하는 직관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직관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먼저 어떤 것을 규정함으로써 성립하는 인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현상세계에 개별적 사물인 사과가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사과를 이러저러한 속성을 가지는 규정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이때 사과의 규정은 사과와 사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에 의해 성립할 것이고, 사과는 그 경계 안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하는 것의 경계는 유동적입니다. 경계는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대립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을 소멸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생각해보면, ‘사과가 빨갛다는 규정은 사과는 빨갛지 않다는 부정과 멀지 않다는 것이죠.

스피노자는 이 점을 통찰했고, 이것은 모든 규정은 곧 부정이다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한 사물의 규정 안에 그 부정이 내포되어 있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의 차이는 그것 자체에 담겨 있는 내적 차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이것은 책이다라고 말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책이 아닐 가능성을 또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금 본 것이 칸트에서 긍정판단과 부정판단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부정판단은 x – F이다 라는 무한판단이기도 합니다. X가 사과가 아니라면,  x가 될 수 있는 것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경계는 긍정에서 부정을 거쳐 소멸되고, 경계의 이동이 무한히 진행됩니다.

 

 

 

우리가 칸트에서 계속 본 것이 정립과 반정립의 대립이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 대립이 종합으로 나아갑니다.

먼저 하나의 경계가 성립하면그 경계 안의 규정이 경계 바깥의 부정으로 바뀌고, 또 이것이 무한을 의미하게 되고이로써 그 경계는 소멸하지만 새로운 경계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 변증법적 사유의 핵심입니다.

긍정과 부정을 거친 합은 또다른 긍정이 되고, 정반합이 무한히 진행됩니다.

 

 



이 과정은 규정된 특수로부터 규정 너머의 보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따라서 변증법적 논리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경계에서 무경계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규정성의 인식은 무규정적 부정성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전자가 주어진 전제 안에서의 인식, 현상세계에 대한 경험적/과학적 인식이라면, 후자는 전제를 캐물어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인식, 현상세계의 경계와 그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같은 차원에서 논할 경우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 철학자가 칸트입니다.

 

 

현상세계에 대한 인식이 감성적 직관과 오성적 사유를 종합한 규정적 인식이라면,

그 현상의 근거, 전체에 관한 인식은 오성과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것을 추구하는 인식능력이 이성입니다.

이때 이성이 추구하는 전체를 칸트는 제약된 현상세계의 개별 사물을 포괄하는 전체라는 의미에서 무제약자라고 칭했습니다.

 

 

칸트가 이념이라고 칭하는 이 무제약자는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세 존재영역 각각에서 그 전체성으로 전제된 무제약자  자아 자체, 세계 자체, 그리고 신입니다.

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확립하기 이전에, 인간 이성이 이러한 무제약자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한 것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인식능력 자체를 반성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비판철학을 반성철학이라고 합니다.

 

칸트 이후에,

피히테는 비판철학의 정신을 보다 심화시켰고,

셸링은 비판철학의 정신을 자연과 존재 일반으로 확대시켰으며,

헤겔은 이들의 철학을 종합적으로 절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의 반성철학 내용은 짧게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성이라는 도구로 절대자에 대한 인식을 얻기 이전에, 이성 자체를 검토하고자 한 것이 칸트의 탐구였습니다. 이러한 이성비판의 결과로 칸트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자아나 세계 자체 또는 신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이성의 인식은 직관형식인 시간공간, 그리고 사유형식인 범주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세계는 인식형식에 의해 제약된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칸트의 주장은 인간은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물자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인식대상으로 삼았던 무제약적 절대자입니다. 자아 자체, 세계 자체, 그리고 신은 제약된 현상 너머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도 도덕적 차원에서 요청될 수밖에 없었죠.

다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현상을 인식하는 주체로서 활동하는 초월적 자아에 대한 자기 의식입니다. 칸트에게서 이 초월적 자아는 경험가능하거나 인식 가능한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히테는 이러한 초월적 자아의 자기의식을 절대적 확실성의 자기정립으로 논합니다.

피히테에서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립하는 절대자아입니다.

세계는 그 자아에 의해 대상으로서 반정립된 비아입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자아는 순수동일성에 머물러있지 않고,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로 분할됩니다. 우리가 정신과 물질, 나와 세계를 이원화해서 파악하는 것이, 바로 절대자아 안에서 이원화된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입니다. 피히테가 절대자아의 자기정립을 논하기는 했지만, 결국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 비아일 뿐이라는 점에서 칸트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헤겔이 비판하고자 하는 칸트철학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용)

우리가 달리기를 한다고 했을 때, 달린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죠. 그냥 달리는 활동에서, 달리기가 어떤 것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식이 무엇인지는 인식활동 속에서만 밝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식능력을 인식대상을 알기 위한 도구니 수단으로만 간주한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인식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식대상과 구분되는 인식도구가 사용된다면, 결국 대상은 그 도구에 의해 변형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돋보기로 글자를 보게 되면, 우리는 굴절에 의해서 왜곡된 글자를 보게 되죠.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 자체도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전제 위에서는, 결국 대상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무분별지 내지 절대지를 얻지 못한다는 회의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인용)

그러나 헤겔은 이 반문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예를 들어 인식대상인 나무 자체에 대한 앎을 얻기 위해서 인식수단인 빛을 제거해버리면, 우리는 나무에 대한 인식도 할 수 없게 되겠죠. 인식작용을 배제한 대상 자체의 인식을 논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대상 자체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지만,

역으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를 이분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는 통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칸트는 진리가 무엇인지, 절대자가 무엇인지를 미리 전제해 놓고, 우리가 그 진리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고, 헤겔은 이 지점을 비판하는 것이죠.

따라서 칸트 사유의 한계는 (인용) 이 됩니다.

피히테의 철학은 절대자아의 활동이 상대적 자아와 상대적 비아와는 별개의 활동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  그러니까 아직 절대적 자아의 활동이 현실적 의식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어떠한 이상일 뿐이라는 점에서 역시나 반성철학의 한계를 가집니다.

 

 

칸트의 주장은 (인용)과 같습니다.

그리고 피히테의 주장은 (인용)과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신과 물질, 인식주관과 인식객관, 인식과 존재의 이원론에 입각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셸링이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인식과 존재의 이원론입니다.

 

셸링에 따르면, 자연 세계는 우리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자발적 활동성을 지닌 무제약적 힘입니다. 자연은 우리의 정신에 의해서 대상화된 현상 내지 비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무한한 활동성을 지닌 무제약자이고 자유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과 물질은 하나가 됩니다. 정신은 비가시적 자연이고, 자연은 가시화된 정신입니다. 철학적 반성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인식과 존재를 갈라놓게 되지만, 마찬가지로 철학을 통해 다시 주객을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따라서 셸링의 철학을 동일철학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인식이 존재 자체의 인식이기 위해서는 인식과 존재의 이원론,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동일철학은 주관과 객관이 궁극적으로 절대적 동일성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주객무분별의 절대지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칸트에서는 이러한 신적 직관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죠.

 

헤겔은 동일철학에 대해, 동일철학이 우리의 현상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미 주객의 분리/대립 속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소홀히 한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현상지와 절대지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결국 절대지와 현상지는 다시 대립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무한과 유한도 절대적 대립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유한과 대립된 무한은 악무한으로, 진정한 의미의 무한이 아닙니다. 유한이 무한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무한도 결국 경계를 가진다는 말이 되니까, 진정한 무한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죠.

진정한 무한인 진무한은 유한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무한, 유한을 통해 실현되는 무한이어야 합니다. 셸링은 무한과 유한을 대립으로 놓고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죠.


 현상적인 차별성이 분명히 있는데, 셸링의 동일철학은 그러한 현상적 차별성을 배제해버리고 무차별적 동일성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깜깜한 밤에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것을 보고 모든 소가 다 검은색이다라고 말하는 식이라는 거죠.

헤겔이 추구하는 것은 현상적인 차별성과 절대적인 동일성과의 관계의 해명입니다.

궁극적으로 동일성을 찾되, 찾아야 할 동일성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것입니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현상지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반성철학의 관점을 먼저 취하게 되죠.

그렇지만 철학의 궁극 목적은 절대자 내지 진리의 인식, 절대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반성철학과 동일철학이 하나로 종합됩니다.

다시 말해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자연적 의식방식인 현상지에서 출발해서 그 궁극지점인 절대지로 나아가는 길을 서술하고자 한 것입니다.

현상지에서 절대지로 나아가는 그 과정은, 자연적 의식이 절대지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자기의식을 거치고 이성을 거쳐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자기형성, 자기도야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길은 영혼이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절망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헤겔은 따라서 이것을 회의의 길, 절망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근세 회의론과는 구분됩니다. 근세의 회의론은 상식 또는 자신의 개인적 확신에는 머물러있지만, 정신현상학에서의 회의는 현상화된 의식 전체에 대한 회의입니다.

또한 정신현상학에서 회의와 절망은 허무주의와도 구분됩니다. 허무주의는 순수한 무만을 보고, 그 순수한 무가 어떤 것의 부정이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헤겔이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정은 특정한 규정에 대한 부정이므로 이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순수 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모든 규정은 곧 부정이다라는 통찰과 상통하는 것이죠.

아까 정반합이 어떻게 무한히 전개되는 지 보았듯이, 규정이 함축하는 부정, 그리고 그 부정이 담고 있는 긍정을 따라 변증법의 논리가 전개됩니다.

헤겔은 현상지에서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의식이 진행해가는 과정을 변증법의 논리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신현상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리의 인식이지만, 그 출발점이 현상지이기 때문에, 그리고 현상지에서 진리는 인식과 대상과의 일치이기 때문에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은 개념과 대상의 일치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개념과 대상이 일치하는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는 개념과 대상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 구분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의식은 그것이 관계하는 의식대상을 의식 자신이 아닌 것이되 의식에 대한 것  대타존재로 의식합니다. 이것은 대상 자체라기보다는, 의식과의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면서 다시 의식이 이 대타존재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을 즉자존재로 정립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식에 대한 진리로 설정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여기서 인식과 진리의 구분은 바로 의식 자신이 행한 구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은 대타존재와 즉자존재, 인식과 진리의 구분을 만들어서, 인식과 진리, 개념과 대상을 이원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인식의 참과 거짓을 대상 자체를 기준으로 놓고 판별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스스로 이 둘을 구분하고 나서 둘이 일치하는가를 살펴보는 식이기 때문에, 이 구분에 머물러 있는 한 인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 불일치를 발견하며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식이 실패했더라도, 그 실패를 자각한 의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또다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개념과 대상의 불일치를 자각할 수 있는 의식은 그 자신이 그은 경계 밖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일치를 발견하며 좌절한 그 의식은 인식과 대상 자체에 대한 구분을 지양하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의식에 상응하여 그 다음 단계의 대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새롭게 생성되는 의식이 새로운 인식방식이 되고, 그에 상응해서 새로운 대상이 정립됩니다. 이것이 인식과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입니다. 새로 생성되는 의식에 다시 새로운 대상이 주어지고, 또 거기에서 생성되는 의식에 다시 대상이 주어지고, 그런 것이죠.

그렇게 새롭게 주어지는 대상들의 발견을 우리는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해서 각 단계의 의식은 새로운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 성립합니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하나의 대상을 놓고 의식의 인식방식을 변경하는 게 아니라, 의식에 따라 새롭게 주어지는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경험을 변증법적 운동과정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신현상학의 각각의 과정은 의식의 경험의 과정이 됩니다. 의식은 스스로 경계를 긋지만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경계 너머의 의식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경계 너머로 나아간 의식은 다시 그 다음 경계를 긋고, 새로운 대상을 생성시키며 그것을 또 대상으로서 인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의식이 더 이상 자체 내에 경계를 긋지 않는 무경계에 이르렀을 때, 그러니까 의식이 더 이상 자신 안에서 구별을 짓지 않을 때, 절대지가 완성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헤겔은 자연, 역사, 정신을 운동과 변화, 발전의 과정으로 나타내고, 그러한 것들의 내적인 연관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끝.